1961년 미국인 신부가 바라본 부산 얻어온 것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이라는 책에 실린 당시 부산의 모습이다. 때로는 글보다 사진 한 장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적은 당시 부산의 거리 풍경은 그 어떤 사진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소 알로이시오 지음, 박우택 옮김 / 책으로여는세상
나의 점수 : ★★★★★

만약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였으리라


한국에 다시 돌아온 뒤, 선교지로 선택한 부산을 재발견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기기 위해 시내를 참 많이도 걸어 다녔다.
당시의 부산 형편ㅇ르 몇 마디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부산은 한 가지 모양의 생활만이 있는 곳이 아니라 여러 잡다한 생활 집단이 섞여 있는 복잡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 시내를 다니며 내가 직접 눈으로 본 모습들은 이러했다.

감색 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단발을 한 여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가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화려하고 밝은 색채로 인쇄된 극장 광고판 앞에서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서 있다. 메릴린 먼로가 나오는 '버스 정류장'이란 영화다. 입장료 1백 환을 내면 가난의 번뇌를 벗어나 얼마 동안 큰 자동차에 화사한 옷을 입은 미국 사람들의 부유한 생활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꿈같은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

공원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거친 날씨에 가죽같이 변한 얼굴 피부를 가진 아낙네가 지나는 행인에게 장난감 총과 활을 쏘아보라며 권한다. 그 총이나 활로 표적이 되는 황소의 눈을 맞히면 캐러멜 한 갑을 딸 수 있다. 아낙네는 젖먹이를 등에 업고 있다. 등에 업은 아기가 배고파 보채면 가슴 앞으로 돌려 젖을 물린다.

한구석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운세를 알기 위해 노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 토정비결을 알려주는 노인들은 대개 갓을 쓰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다. 으레 이 사람들의 주위에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뛰어놀기 마련이다.

약 파는 장수는 북을 등에 멘 채 발을 움직여 북을 두드리고, 손으로는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구경한다. 또 다른 곳에서는 피리 부는 눈먼 소년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다.

거리에는 할 일 없는 사람, 한 끼 식사를 얻으려는 사람, 구경거리를 찾아 심심한 자신을 잊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길에서 아주 작은 소동이라도 일으켜보라. 호기심 많고 자신을 잊고 싶은 군중이 순식간에 몰려들 것이다.

길모퉁이에 빈 지게를 짊어진 남자가 일거리를 기다리며 고개를 수그린 채 서 있다. 일거리 하나에 적어도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일요일 새벽, 영도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하려고 걸어가다 보면 반대쪽에서 영도다리를 건너오는 아낙네들의 긴 줄을 볼 수 있다. 모두 머리에 큰 짐을 이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일주일 내내,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겨우 몇 푼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어제는 하나도 못 팔았지만, 오늘은 누군가가 사 주겠지.'

이른 아침, 길가 판잣집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나온 어른과 아이들이 대야에 담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는다. 잠시 뒤 아낙네가 나와 길옆 도랑에 요강을 비운다.

오후가 되면 해녀들이 큰 바구니를 등에 메고 바다로 간다. 5월 바닷물은 여전히 차갑다. 그러나 그들은 강인하다. 강인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인한 사람들이다. 5월뿐 아니라 12월에도 바다에 들어간다. 한참 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역을 바구니에 잔뜩 담아 등에 지고 시장으로 간다. 한국 사람들은 미역으로 국을 만든다.

음력 설날이다. 민속 춤꾼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장구와 꽹과리와 징을 흥겹게 치면서 동네를 돌아다닌다. 막걸리와 대접을 받은 이들의 얼굴은 붉고, 눈은 유리처럼 빛이 난다. 낮은 흙더미 위에 놓인 긴 널빤지 양끝에 어린 여자아이 둘이 서서 널뛰기를 하고, 그 옆에서는 두 여자아이가 긴 고무줄을 양끝ㅌ에서 잡고 다른 여자아이는 줄 위에서 노래하며 뛴다. 돌아서기도 하고, 줄을 발로 감기도 한다. 어떤 여자아이는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도 잘도 뛴다. 마치 발에 용수철이 붙어 있는 듯 뛰어오르는 솜씨가 참으로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니 남자아이 셋이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도 그들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이들은 무표정한 검은 눈으로 내 얼굴을 계속 올려다본다. 나의 큰 코와 갈색 눈에 정신이 홀린 모양이다. 자신들과 같은 검은색이 아닌 갈색 눈으로 어떻게 사물을 볼 수 있는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양장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넘어질 듯 조심조심 걷는 한 아가씨 뒤에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따르고 있다. 양장에 뾰족구두를 신은 여성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던 시절이다.

한국에 사는 한 외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는 반면, 서양 사람은 자연적으로 위험에 빨려 들어간다." 이 말에 대한 좋은 실례가 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명의 한국인 신부와 함께 부산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신부는 내 오른쪽에, 다른 신부는 왼쪽에 섰다. 셋이 같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발밑이 꺼지면서 나만 하수구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더러운 수챗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두 한국인 신부들은 웃으면서 나를 꺼내주었다. 하수구에 덮개가 없고, 위험 표지가 없어도 한국 사람들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비스듬히 달리던 버스가 자전거를 탄 어떤 젊은이를 치었다. 공중으로 붕 솟았다가 땅에 떨어진 젊은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옷을 툴툴 털고는 웃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한 남자가 큰 돼지를 묶어 실은 자전거를 타고 번화가의 복잡한 길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위험스럽게 운전해 가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전거 앞바퀴가 전차 궤도에 끼고 말았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고, 뒤에 실린 돼지는 줄이 풀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벌떡 일어난 남자는 손짓을 하면서 소리소리 지르며 돼지 뒤를 쫓아간다.

빨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 지프 운전사가 창밖으로 팔을 내밀고 있었다. 줄이 탄력 밴드로 된 시계를 차고 있는 운전사를 한 도둑이 노려보고 있다가 잽싸게 시계를 벗겨서는 달아난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뒤쫓아간다. 길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도둑이 날쌔게 지프에 올라 차를 몰고 도망친다. 차는 이쪽으로, 시계는 저쪽으로 달아나자 뒤쫓던 운전사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

영도다리 밑에는 마치 개집 정도 크기의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앞을 못 보는 점쟁이가 몇 푼의 돈을 내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운명에 관한 숨은 비밀을 말해주는 점집이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낡은 천막집 앞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 천막 위에 진흙으로 'HOME, SWEET HOME' 이란 영어가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한 거지가 골목에서 가마니를 깔고 큰 종이 판지를 담요처럼 덮고 자고 있다. 판지 밖으로 불쑥 나온 발은 동상에 걸려 있다. 그 옆에는 세 명의 소년이 얇은 담요 한 장을 나눠 덮고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마치 강아지처럼 함께 엉켜 자고 있다.

두 다리고 없는 장애인이 궁둥이를 땅에 깐 채 달려오는 차들을 가까스로 피하며 바쁘게 거리를 건너가고 있다.

한 아낙네가 통증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 배를 움켜잡고 길 위에 눕자,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한 코흘리개 세 아이가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있다.

앵벌이들이 옷 잘 입은 여자에게 기생충처럼 달라붙어 응당 권리가 있는 것처럼 얼마의 돈을 받아낸다.

은행 건물 앞 모퉁이에서는 한 여자가 몇 시간이고 서서 혼자 중얼거리며 웃고 있다.

도랑으로 흐르는 대중목욕탕의 더러운 물에 여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한 상인이 다 해진 몇 권의 낡은 타임지와 라이프 잡지, 몇 개의 손전등과 미군 피엑스에서 흘러나온 깡통을 좌판에 늘어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앉아 있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한 노파가 길에서 주운 꽁초들을 모아서 만든 담배를 길에 앉아 팔고 있다.

끝없이 떠드는 사람들 소리,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려대는 택시의 경적 소리,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엿장수의 찰깍찰깍 가위 소리, 사람들의 눈을 끌기 위한 동동크림 장수의 북소리, 화재와 도둑을 막기 위해 구불구불한 부산의 밤 골목을 누비며 두드리는 야경꾼의 둔탁한 막대기 소리, 아침 5시부터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까지 불러대는 학생들의 서양 노랫소리, 어른들의 구슬픈 유행가 소리, 웃음소리, 고함치며 노는 골목의 아이들 소리, 레코드 가게의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음악 소리, 죄인의 회개와 영혼 구원을 위해 공원에서 연주하는 구세군 악대의 군가 같은 음악 소리, 밤 10시가 되면 틀림없이 울리는 장로교회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종소리...

부산 시내는 어전히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정신없고, 바쁘고, 가난했다. 그리고 산비탈 판잣집들은 나무 한 그루 업슨 민둥산 꼭대기를 향해 여전히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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