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 소 알로이시오 내가 먹은 것

어느 날 스팸메일을 무심히 삭제하다가 서점에서 보낸 메일에서 딱 멈췄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이라는 심상찮은 제목이 보였기 때문. 저자의 이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우리 신부님께서 책을 내셨다니!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본명은 알로이시오 슈월쓰(그때는 슈왈쓰라고 썼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해 부산 송도에 본당신부로 부임했다. 전후 빈민들의 참상을 보다못한 그는 교육기관을 갖춘 최초의 고아원인 소년의집과 최초의 무료병원인 구호병원을 설립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아들 딸이 가장 많은 분이다. 나도 그분의 아들이었다. 소년의집에서 보낸 4년 여의 생활은 당시에는 괴롭고 쓸쓸했으나 이제와 돌이켜보면 유년시절에 집을 떠나 스물 남짓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그곳에서의 생활이 가장 상식적이고 이성적이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그분의 인간적인 면모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가 미사 시간에 소란을 떨 때에만 하를 내는줄 알았는데, 책에서 보니 그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멸시받을 때 가장 크게 분노했다.

한국의 어른들이 포기한 아이, 한국의 정부가 포기한 행려, 한국의 병원이 받지 않는 환자를 그분 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분보다 테레사 수녀가 한국에 더 알려져있다는 사실에 좀 화가 난다. 언젠가는 지인과 신부님 이야기를 하다 막사이사이 상을 받으셨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는 막사이사이 상은 상 자체에 문제가 있으므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얘길 했다. 나는 신부님 얘기를 한 것인데 그는 상 얘기만 해서 화가 났다.

나처럼 특별한 추억이 없더라도 좋은 책이다. 전후의 참상에 대해서 그린 책은 많지만 이 책에서는 외국인의 눈으로 본 객관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부님이 바라본 군부 쿠데타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여러 모로 읽어볼만한 책.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소 알로이시오 지음, 박우택 옮김 / 책으로여는세상
나의 점수 : ★★★★★

만약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였으리라



다시 큰길로 나왔다. 양쪽 인도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고, 지나는 택시마다 경적을 울려 거리는 온통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포대기로 어린 여자 아기를 업은 한 소년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여자 아기의 머리카락은 엉켜 붙어 있었고, 아기를 업은 소년의 옷은 더 이상 해질 곳이 없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소년의 표정이었다. 이 세상의 온갖 슬픔과 불행을 아무 불만 없이, 아무 반항 없이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년은 걷기를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삐 지나는 행인들 다리 사이로 몸을 숙이고는 곧바로 차가운 길바닥에 옆으로 드러누웠다. 아기는 여전히 소년의 등에 업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몸을 숙여 10환짜리 지폐를 놓고 갔다. 소년은 마치 상처 입은 동물처럼 길바닥을 아무 반응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돈을 받아 쥘 동작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등에 업힌 아기의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돈을 쥔 아기는 장난질을 하다가 길바닥에 던져버렸다. 잠시 뒤 나이든 한 부인이 허리를 굽혀 소년의 팔을 붙들어 일으켜 세웠다. 찬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점잖게 나무라는 것 같았다.
소년은 말없이 일어서더니 아기와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 때문에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이 누웠던 자리에는 지폐 한 장이 바람에 나부끼며 그대로 놓여 있었다. (p.23)

어느 날, 남미에서 막 귀국한 메리놀회 신부님이 신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남미에서 활동하는 우리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부자지요. 이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입니까? 우리가 가진 부와 힘을 현지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지요. 우리의 활동을 분석해보니 우리의 부와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뒤 신학생들을 위한 주일 강론에서 학장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이곳이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신학교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는 선교회를 찾기로 했다. 첫째, 선교 사업 둘째, 교구 사제의 신분 유지 셋째, 그리스도의 가난이었다. (p.50)

불제자들에게 인생은 단순하며, 행복이란 행복하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p.78)

부산항을 떠난 지 13일 만에 화물선 마우브레이 호는 오클랜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화물선에서 승선 사다리를 아래로 내리자 가방을 팔에 낀 세관원들이 배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휴게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여권 확인과 짐 검사를 시작했다.
"신부님,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한 세관원이 내가 갖고 있던 낡은 군용 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금이나 아편 아닙니까?"
"둘 다요."
그러자 세관원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신부님. 가도 됩니다."
자신을 머피라고 소개한 혈색 좋고 약간 뚱뚱한 몸집의 세관원은 내게 다음 여행 계획을 물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밤 11시 45분 비행기가 있는데 가능하면 그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말했다.
"신부님, 괜찮으시다면 제가 30분 뒤면 일이 끝나는데 저희 집으로 가서 식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 다음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면 안 될까요?"
그 사람은 내가 가난한 한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 차 돌아오는 길이며, 비행기 값이 없어 배를 얻어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선장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p.94)

"한 푼도 안 냈어요. 오히려 내 짐 무게는 한계 무게보다 약간 덜 나갔어요."
그제야 나는 주교님의 모습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에서 본 주교님의 모습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주교님은 짐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방에서 겨울 외투를 두 벌이나 꺼내 양복 위에 껴입고, 작으면서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외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는가! 그 무더운 9월 중순 여름에 말이다. 그래도 주교님은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p.121)

내가 요양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후에 한국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먼저 정부가 바뀌어 있었다. 1961년 무혈 쿠데타로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훗날 총선거를 통해 정권을 합법화한 그들은 강압적인 통치로 그럭저럭 효과적인 국가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부정부패가 어느 정도 없어진 것 같기도 했고, 거리도 한결 깨끗해진 것 같았다. (p.123)

성당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그러다가 결렬한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다. 갑자기 미국의 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개를 특별히 싫어할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 해 10억 달러 이상의 돈을 개를 먹이는 데 사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먹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개들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도 있고, 뛰어놀 수 있는 뜰도 있고, 병이 났을 때 치료해주는 병원도 있었다. 한마디로 미국에 사는 개들이 내가 맡고 있는 송도 성당 신자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의 이치일까?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권리는 없는 것일까? (p.144)

솔직히 말해서 한때는 나도 우편 모금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그리스도교적 자선은 종교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내 가치관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국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본당신부가 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처한 환경이 주저하던 내 마음으로 하여금 행동을 하게 하는 놀라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목에 칼을 들이댄다고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그들은 많은 것을 가졌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많은 것의 일부를 얻기 위해서는 칼을 들이대는 길밖에 없는걸! 할 수 없지 않은가!"
손수건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국제 우편을 통한 모금의 효과를 시험해본 일이 있었다. 미국에 똑같은 종류의 우편물을 보냈는데, 한 편지에는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만 넣어 보내고, 다른 하나에는 편지와 함께 손으로 수를 놓은 손수건을 넣어 보냈다.
회신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모금 편지만 받은 사람들 가운데 겨우 7%만이 구호금을 보낸 반면, 손수건과 함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33%가 구호금을 보내왔다. 손수건을 넣었을 때 4배 이상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모금 편지와 함께 비싸지 않은 선물을 받을 경우, 우편물을 받은 사람은 미묘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되는데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좋은 기분으로 내는 자발적 자선은 단지 고상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고상한 생각은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정의의 의미에서 볼 때 남는 재물을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기부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느 정도의 세속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가난한 한국 사람들의 절박한 처지를 경험한 뒤에 갖게 된 판단이었다. (p.156)

한국자선회의 손수건 사업을 통해 모은 구호금은 최 주교님과 의논해 병원과 고아원, 나환자 수용소, 부산 교구 내 여러 학교를 비롯해 복지사업을 하고 있던 기존 단체에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는한 사람을 돕는 데 있어 기존의 방법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구호금을 최대한 알차고 쓸모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직접 구호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구호금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몇몇 고아원은 시설이 훌륭했지만 대부분의 고아원은 비참할 정도로 열악했다. 마산의 한 고아원은 작은 방 하나에 3살부터 12살 되는 아이들이 무릎에 이불을 덮고 촘촘히 줄지어 앉아 있었는데, 손에 매를 든 10대 후반의 여자가 무서운 눈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으 혼돈과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끔찍했다. (p.172)

아동복지사업 초기, 나는 송도 성당 가까운 곳에 단위 주택들을 여러 채 지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 수가 지나치게 많거나 또는 재정적인 부담을 안고 있는 큰 보육원으로부터 아이들을 인수했다. 대부분 6살에서 7살 사이의 남녀 아이들로 1백 20명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6명에서 7명으로 나누어 가정 하나를 이루게 하고, 마리아보모회에서 1년 동안의 교육 기간을 마친 지원자 한 사람을 책임자로 정한 뒤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살게 했다. (p.181)

당시 부산 뿐 아니라 그 어느 곳에도 가난하고 돈 없는 환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는 병원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참는 것이 약이다 하며 살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을 악화시키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우고 싶었다. (p.191)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은 실력 있는 의사와 간호사, 의료기사를 구해 의료진을 짜는 일이었다. 실력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월급을 많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이 휴게실에 앉아 담배나 피우고 커피를 마시면서 잡담이나 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환자들이 모두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의료진을 원했다.
대부분의 한국 의사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교양이 있었고 몸에서 냄새도 나지 않았으며, 병원비 말고도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을 건네주는 돈 많은 환자들을 좋아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다른 병원보다 월급을 10~20% 더 준다는 조건으로 직원들을 구했다. 그렇게 해서 실력 있는 전문 의료 인력을 갖추고 '구호병원' 문을 열 준비를 끝냈다. (p.192)

언젠가 구호병원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설문 가운데 '만일 구호병원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 가운데 약 40%가 '아마 죽었을 것' 이라고 했다. (p.197)

희망원은 건물과 주위는 그럭저럭 깨끗했지만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는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포의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50~60명의 아이들이 한 방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양반다리를 하고 입을 꼭 다문 채 앞에 앉은 아이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주위에는 대부의 부하로 보이는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사나운 눈초리를 한 채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것이 사회와 가정에서 버리받은 아이들을 ㅐㅈ교육하고 재생시키는 대부의 방식이었다. (p.213)

기초 학습을 시킨 뒤 아이들을 인근 두 곳의 초등학교에 나누어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차가웠다. 또래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물론 교사들조차 우리 아이들을 멸시하며 고아, 거지, 인간쓰레기라고 놀리며 따돌렸다. 교실에서는 날마다 싸움이 벌어졌고, 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책임을 씌워 벌을 주거나 교실 맨 뒤에 세워 놓았다. (p.225)

그때만 해도 월요일이 되면 부산 교구에서 사목하던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들은 서면에 있는 미군 부대에 가서 소고기 스테이크를 포함한 각종 미국음식을 즐겨 먹었지만 신부님은 결코 그곳에 가지 않았다. (p.259)

준공식이 끝난 다음, 도티 씨는 신부님에게 양복을 한 벌 맞춰주고 싶다며 함께 이태원으로 가자고 했다. 도티 씨는 신부님이 입고 있던 양복이 10년도 더 된 낡은 양복이라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하지만 신부님은 은인 중에서도 최고의 은인인 도티 씨의 호의를 마다하고, 입고 있는 양복으로 만족한다면서 사양하고 또 사양했다. 신부님은 구두나 양복을 맞춰 입는 분이 아니었고, 필요하면 기성화나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하지만 도티 씨가 계속 권유하자 신부님은 도티 씨의 마음이 상할까봐 결국에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무튼 신부님은 마지못해 도티 씨를 따라 이태원의 양복점에 가서는 옷을 맞췄다. 다음날 도티 씨와 아들 빌은 다시 양복점에 가서 가봉을 끝내고, 우편으로 양복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며칠 뒤 신부님도 가봉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양복은 내가 찾아와야 했다. (p.267)

신부님의 가족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비롯해 아버지와 위로 형과 누님 그리고 네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신부님은 60회 생일을 맞으면서 "한국에서는 33년 동안 살았고, 미국에서는 겨우 23년밖에 살지 않았다."고 하셨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10년을 더 오래 산 셈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았지만 신부님은, 젊어서 상처하여 홀로 7남매를 키운 아버지를 한국에 모셔와 자신의 사업을 구경시켜 드리거나 자랑한 일이 한 번도 없다. 구호사업을 위해 모금한 돈을 특별한 이유 없이 개인적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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